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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경영학과 이영일교수 광주매일신문 기고조회수 1021
박지호2021.11.0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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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산으로 간다

 

긴 계곡의 웅장한 봉우리와 단풍의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껴보려고 국내 최대 바위산 협곡이면서 동양화적 분위기를 뽐내는 국립공원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을 찾아갔다. 나는 새벽 세 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다섯 시 십분에 설악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아침 식사를 끝낸 후 본격적인 등산길에 올랐다.

 

비는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어둠이 아직 남아 있고 소슬한 갈바람이 우수수 낙엽을 흩뿌리니 괜히 으스스하고 뒤숭숭해지며, 신흥사 소공원의 거대한 청동 좌불상의 묵직한 모습에 난 잠시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니 가슴마저 젖어 든다.

 

노산 이은상 시인은 설악산 여행 중에 가을비 내리는 암자에서 깊은 산 가을밤에/ 비소리 구슬프다/ 저 스님 무슨 생각에/ 눈을 감고 앉았는고.// 나도 따라 눈 감고 앉아/ 비소리 들어본다/ 비소리 눈 감고 듣지 말게/ 가슴 젖어 드느니.”라고 읊었던 시구(詩句)가 떠올랐다.

 

가을 산속 비선대로 가는 숲길 위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여느 날과 달리 매우 청량하며 앞을 봐도 웅장한 산이고 뒤를 봐도 하늘 아래 기암괴석(奇巖怪石)들이 필름 돌아가듯 펼쳐진다.

 

비선대를 지나서 오륜폭포에 도착하니 어디선가 차가운 기운이 두 뺨을 스치면서 귓전이 터질 듯 내려 찢는 물소리가 한 가슴 밀어닥쳤다. 찬란히 부서졌다가 다시 이루고 밤하늘을 지킨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까악 까아악하며 아침을 맞아 주는 노랫소리에 빨갛게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은 즐겁게 미소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등산화에 밟혀 바삭거리는 단풍잎들은 깔깔 웃으며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생명력이 넘치는 웅장함과 미려함의 매력을 지닌 계곡 주변의 바위를 올려다보며 천불(千佛)을 세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고 혹시 놓칠까 뒤돌아 다시 본다.

 

귀면암(鬼面岩)은 자세히 바라보니 과연 귀면(鬼面) 같았으며 그 아래 골은 적상(赤裳)으로 둘러싸여 장관이고 담()은 명경지수라 얼굴 씻기조차 미안할 정도다.

 

계속 계곡을 따라 오를 때 산허리를 휘감던 안개는 흩어지고 한낮 햇살에 쫓겨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산에 오르면 찬란하고 억울했던 기억들은 채색된 저 숲속으로 떠내려간다. 갑자기 고요한 산과 우리 사이에 환희의 아침 햇살이 빛나 그간의 아픔과 상처를 후벼 파고 곳곳의 산과 물 그러한 당신과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몸을 낮췄다.

 

계곡 단풍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내 어깨에 툭 내려앉았다. 내 몸에 자연이 내려앉은 기분이어서 천불동 계곡이라는 자작시 !/ 가을이 내려앉은 설악계곡에/ 병풍처럼 펼쳐진 준봉들과/ 수 십 개의 능선들 사이로/ 유장하게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이야말로/ 계산무진의 전형이 아닌가.// 햇살은 설악 아래로 멀리 비추고/ 산들은 그 색이 엷어지며/ 그간의 아픔과 괴로움 속에서/ 소리 없이 지나가는 세월을 잊고/ 겹겹이 포개 겨울을 준비하네.// 행여 견딜만하면/ 제발 오시지 마라던 이곳을/ 일모도원하는 시공인데도/ 굳이 찾아가 계곡에 안겨/ 속진의 마음을 수선하네.”를 떠올리며 걸으니 마치 텅빈 내 가슴에 푸르름이 찾아와 온유함으로 채워지는 듯하였다.

 

이제 잎새마다 수채화로 그려 놓은 것처럼 무수히 붙어서 푸름으로 치닫던 이파리들의 갈망이 끝나 자유로움을 만끽할 것이다. 더 자라야 한다든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홀가분한 산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간 기암괴석 사이를 바라보는 내 눈앞에 검은 구름은 화채능선과 공룡능선을 넘어 먼 하늘로 흩어지고 어둠에 뻐기고 솟아오르는 설악의 광명이 나뭇잎마다 채색되어 중년에 이른 나조차 아직 다가오지 않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게 된 20211022일은 우리 부부가 오랜만에 찾아온 설악행각(雪嶽行脚)의 기쁜 날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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